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학자이자 신부인 ‘칼 라너’는 가톨릭교회가 나치독일에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동의했었던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실 이것은 로마 가톨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 개신교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때로 많은 부분에서 그 신도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그들의 말은 대체로 그 종교의 경전에 기조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지고, 그것이 또한 해당 종교의 도덕적 행위와 직결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인간의 현세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종교가 영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현세적 삶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세적 관점의 정치 또한 인간의 내면적인 것이 주는 행복감이 현실세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정치는 종교를 통해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고, 반대로 종교는 정치를 통해서 세속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정치로서는 권력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고 또 종교로서는 포교 활동에 대단히 큰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 왕은 신 혹은 그 대리자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와 달리 매우 복잡해진 세상은, 한 사람이 모든 정보를 처리해서 하나의 해결을 도출해 내기는 너무도 어렵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해결 방법이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현대의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서로 논쟁하며 최선을 도출해 나간다. 다시 말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여러 정당들을 만들고 그 정당들 간의 합의를 통해 정책을 만들어 간다. 이것은 정책 가운데 ‘절대 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들 지도자의 말을 무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한다. 이것이 그들의 도덕적 그리고 신앙적 바른 자세라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로 종교지도자는 자신들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 ‘신의 뜻’을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신도들의 도덕적 삶과 종교적 삶을 위해 매우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통해 정치적인 권력을 얻으려 할 때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물론 그들은 종교의 대표자로서 그 목소리를 높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사안을, 모든 사람에 맞춰, 그들의 종교적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예수’나 ‘알라’ 혹은 ‘부처’가 그들에게 직접 게시하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같은 종교 내의 지도자 간 다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누가 그들에게 종교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치 정권 당시 대부분 독일교회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그리고 사회, 경제적 구원을 위해서는 ‘히틀러’를 보내셨다고 주장했다. 물론 독일의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인 ‘본회퍼’는 이를 ‘히틀러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 비판했었다. 하지만 당시 종교적 대표성은 어느 것이 옳은 판단인지 여부와는 관계없었다. 결국, 독일 기독교는 당당히 독일 ‘국교’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치는 ‘유대인 학살’과 ‘전쟁’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대표성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여러 사안을 결정할 때, 당연히 거쳐야 할 여러 사람들의 고민의 시간이 한 명의 종교지도자에게 집중된다. 따라서 그들이 마땅히 관심 가져야 할 다른 일들에는 소홀하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위로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치치하의 유대인들은 독일교회로부터 어떤 효과적인 위로도 얻지 못했다.
예수가 당시 나치 정권에 있었다면 어디에 관심을 가지셨을지 생각해 보라. 과연 그는 핍박받는 유대인이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보다 소위 기독교의 확장과 권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을까? 그들의 잘잘못 여부를 떠나 분명 예수는 ‘핍박받는 유대인’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에 관심을 집중시켰을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에게 말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여기서 ‘가이사의 것’은 단순히 동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로마에 굴복하고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인 유대인을 비웃는 말이었다. 또 본질을 잃어버리고 ‘가이사의 것’을 쫓는 유대인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종교지도자들 역시 한 사람의 시민이고, 그래서 이들의 정치참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가 아닌 종교지도자로서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대표성이라는 것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이것은 어떤 정치적 횡포에도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권력의 횡포에도 소외받는 자와 핍박받는 자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권력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력은 보통 권력자체를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가이사의 것’을 쫓던 무리는 헤롯당원들로, 정치적 특권을 누리던 사람이었던 것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 Daniel 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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